짤막한 단편들을 모아두어 자기 전이나 지하철을 탈 때 한두 편씩 읽기 좋다. 먼저 읽었던 2018년 수상집을 읽을 때보다 집중력이 조금 향상됨이 느껴진다.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 내게 도움이 되고 있는 고마운 시리즈라고 할 수 있겠다. 도서관에서 빌려왔기 때문에 적당한 긴장감과 의무감이 유지되는 점도 좋다. '호수' 까지만 읽고 반납했다. ㅜㅜ.

■ 임현 '고두'

"너라면 다를 줄 알겠지그러나 네가 다른 게 아니란다다만 그런 상황이 너에게 없었을 뿐."

나의 말은 모두 맞고, 논리적인데 비해 나 외의 세상은 항상 비합리와 비이성으로 가득하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보다는 변명이 훨씬 쉽고, 남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내가 틀린 사람이라는 것, 사실이든 가능성이든 이를 인정하는 시기를 거치고 나면, 후회와 함께 잃었던 것들이 크게 다가온다. 왜 인간은 이런 식으로 '성장' 하게 설정된 것일까이 작가는 나와 성격이 매우 닮았다. 저번에 작품보다 작가노트에서 더 많이 공감한 게 우연이 아니었다.

■ 최은미 '눈으로 만든 사람'

같은 무게의 비극이나 슬픔을 다룰 때, 여성의 경우 훨씬 잔인하고 끔찍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버스에서 읽다 어지러워서 가고자 했던 곳 보다 일찍 내려야 했다. 역겨움과 괴로움은 너무 생생한데 죄 지은 놈이 벌을 받는 통쾌함은 소설 안에만 있는 것 같아 찝찝함이 남는다눈사람이라는 세트 안에서 강 씨와 백 씨, 세대와 성별을 뚜렷하게 구분하며 다양한 소재들을 은근하게 훑는 작가의 내공이 깊다.

■ 김금희 '문상 

문상을 가게 되면서 나빴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데 그것이 따분하지 않고 퍽 자연스럽게 흥미롭다.  작가노트에 "소설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나쁨에 대한 지겨운 고백을 듣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표현이 있는데, 혼자 책을 읽으면서 송과 희극배우와 양과 함께 앉아있는 기분이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맞는 말 같다, 작가노트에 "이 소설은 어느 나쁘지 않은 오후에 누군가의 문상을 가듯이 읽어주었으면" 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딱 그렇게 읽었다. 언젠가 이 세계에서 지워져 기억으로만 남는 사람임은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 기억으로라도 남고 싶다.

■ 백수린 '고요한 사건'

시골에서 도시로, 평범에서 가난으로, 반전된 캔버스 위에서 인상 깊게 그려지는 사춘기, 성장의 시간. 전형적이고 익숙한데 지루한 맛이 없이 읽힌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나도 이 시기가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음이 분명한데, 그 시기를 다시 겪고 싶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만큼 매력이 있다해지도 무호도 나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자라고 있다. 우리 셋을 아파트 아이들로부터 격리시킨 것은 어른들의 사정이지만, 그들도 치열하게 아파트, 재개발 속에 들어가려 살고 있다. 다만 만만한 고양이 아저씨에 대한 폭력이 가장 빨리, 가장 잔인하게 시작된 것. 그것까지 어른들의 '어쩔 수 없는' 사정에 포함시키고 싶진 않다. 현실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에서만큼은 한 줌 낭만 정도는 지키고 싶다.

■ 강화길 '호수'

작품에서 페미냄새가 짙고, 해설에서 코를 막아야 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장르의 본분에 충실한 범죄물, 스릴러다. 2018년 수상집의 한심한 퀴어 소설마냥 징징대는 느낌 없이, 제대로 정면승부 한다. '있을 법한 이야기'로 사회에 물음을 던지는 일과,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긁어모아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꽤나 잘 쓴 소설이라 웬만하면 전자에 속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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