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미국은 숨을 고르고 도약할 준비를 하는 시기였다. 1492년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 이후 4세기가 지났다. 이제 국내에는 더 이상 정복할 곳이 없었고, 세계로 눈을 돌려보니 늦은 감이 있었다. 내적으로는 남북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하나되어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하나된 미국이 세계 데뷔전의 무대로 선정한 곳이 바로 시카고였고, 미국은 <시카고 박람회>를 통해 성공적인 데뷔를 치뤄냈다.


‘미국=뉴욕’ 이라는 등식은 당시에도 성립했지만, 시카고가 뉴욕을 제치고 박람회를 유치했다. 시카고는 박람회가 있기 20여년 전에 시카고 대화재 (1871)로 도시의 대부분이 전소되었지만 미국은 시카고를 버리지 않았다. 19세기 미국의 가장 큰 화재 사건을 겪어낸 폐허 같던 도시를 통합과 발전의 상징으로 탈바꿈해 회복과 도약의 심볼로 삼았다. 또한 너른 토지를 바탕으로 농업이나 목축업으로 성장한 도시인 시카고는 그야말로 ‘미국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미국의 세계무대 데뷔전이 펼쳐지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시카고 박람회는 4년 전의 파리 박람회를 뛰어넘기 위해 신중하고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약 811만여평(663에이커)에 이르는 박람회장은 그 크기만으로도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 위에 세워진 하얀색 대리석 건물들의 배치와 조화로 미국의 미적 감각을 맘껏 뽐냈다. 박람회가 열리던 잭슨파크는 도시의 축소판이었다. 깨끗한 화장실과 수도, 완벽한 하수처리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고, 당대 최고의 기술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백색 도시”라는 별명은 “회색 도시” “검은 도시”였던 시카고의 재건을 상징하고, 미국의 흘러 넘치는 기술력과 국력을 표현하는 적절한 표현이었다. “백색 도시”는 미국과 국제 사회에 큰 인상을 남겼으며, 이후 미국의 도시 계획의 기준이 되었다.


시카고 박람회에는 내적 결속을 다지고, 외적으로 미국의 부강을 드러내는 것 외에도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 ‘개척’이나 ‘정복’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에 미국 국내에는 미개척지가 없었고, 미국이 백색 도시화가 된다면, 미국 국민들에게 “다음은 어디?”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이후 스페인, 동남아와 중남미 등으로 다양하게 뻗어나가면서 세계 무대의 패권을 점차적으로 잡아간다. 하얀색 대리석 건물들을 장식하고 있던 로마 양식은 19세기에 새로운 로마 제국이 탄생한다는 은유였던 것이다.


1880년대 후반 미국 서부의 큰 가뭄과 전반적인 경기 불황으로 시카고 박람회는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미국의 발달한 문명과 진보를 보여주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고, 정복의 ‘정당화’에도 성공했다. 시카고 박람회는 황폐한 도시를 백색 도시로 만들었듯, 정복은 발전의 필수요소라는 은근한 어필이었다. 백색 도시 옆에 초라하게 늘어선 원주민과 외국 부족들의 ‘덜 개화된’ 모습에 발전과 진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미국 국민은 없었다.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 미국의 위대함과 그 위대함을 '전파' 해야 한다는 사상을 제대로 새긴 시카고 박람회는 미국의 성공적인 세계무대 데뷔전이었음은물론, 미국 역사 전체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 참고문헌

서양학자 13인. (2008). 서양 문화사 깊이 읽기 1. 푸른역사.


* 원래 <지킬박사와 하이드> 때문에 

빅토리아시대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빌린 책이 서양문화사라서 갑자기 ... ㅋㅋ

덕분에 전혀 모르던 얘기를 공부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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