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민과 황정민 모두 지금까지의 커리어 가운데 가장 빛나지만, 거장으로서의 발걸음을 뗀 윤종빈 감독에게 박수가 가야 마땅하다. 두 보석을 수집한 것 만으로도 대단한데, 최고의 광채를 이끌어낸 뒤, 가장 아름다운 비율과 위치로 배치해버렸다. <용서받지 못한 자> 부터 윤종빈의 작품은 무조건 챙겨봤음에도, 페르소나인 하정우가 한국 영화 시장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 것에 비하면 윤종빈의 성장은 더뎠다. 대부분 대배우들의 연기(acting)만 남고 마는 화려한 연기(smoke)가 되어 사라지곤 했다. <공작>은 윤종빈에게 가졌던 아쉬움을 채우는 작품이자, 윤종빈 시대의 출발점이다.


여름의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건물 외벽에 걸린 포스터를 처음 봤고, 그 때부터 꼭 개봉 당일에 극장에 달려가겠노라고 다짐했다. 1) 실화인 '흑금성 사건'에 바탕을 두었고, 2) 황정민과 이성민으로 하여금 자괴감이 들게 하는 강도 높은 연기가 요구되었다는 인터뷰를 봤기 때문이다. 드디어 8월이 왔고, 지체없이 극장으로 달려갔다. 평소에는 자고 있을 시간대였는데도, 시계를 확인할 틈도 없이 137분동안 마음껏 두근거렸다. '혼자 롯데시네마 신사에서 본 영화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징크스도 아직 유효하다.


 

영화를 끌고 나가는 엔진은 '흑금성' 역의 황정민이고,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실제로 만들어진 가공의, 특수한 삶을 다시 연기로 풀어내야하는 고난이도의 작업임에도 황정민이 흔들리면 영화의 동력 자체가 끊어진다. 황정민은 모순되고 가려진 흑금성 그 자체로 다시 태어나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연기로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끈다. 군인으로 살다 임무가 바뀌어 기존의 삶을 완벽히 처분한 뒤, 사업가가 되어 북한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에서 한 순간도 어설프지 않게 중심을 잡을 배우가 몇이나 되랴. <공작>을 통해 지난 몇 작품에서 계속되었던 자기복제로부터도 많이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렇게 대단한 황정민보다도 칭찬하고 싶은 이가 이성민이다.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길래 그가 기존의 연기를 '더럽게 어렵게 했다'라고 표현했는지 너무 궁금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했다. 두 시간이 넘도록 단 한번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빠른 호흡으로 황정민의 보조를 맞춘다. 엔진이 맘껏 날뛸 수 있게 미션부터 브레이크, 스티어링까지 궂은 일은 도맡는다. 스토리의 핵심이 되어주는 북한의 고위 정치인, 거대한 갈림길 앞에서 고민하면서도 빠르게 행동과 결과로 이어져야 하는데 참고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그런 인물을 이성민이 굳세게 만들고, 지탱한다. 영화 곳곳의 설정이나 마무리, 하다못해 사투리나 김정은 역할까지 매무새가 완벽하게 딱 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벼이 넘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성민이 있었기에 이 영화는 완벽에 가까울 수 있다. 


남한의 콘크리트 건물에서는 썩어빠진 사회의 골조가 그대로 드러나고, 북한의 주석궁에서는 거대하고 웅장한 체제 뒤의 나약함과 비참함이 적나라하다. 건물 안팎에서 죽어나가고 이용당하는 것은 무고한 국민들이다. 최고급 연기를 통한 심미적 재미는 물론 날카로운 시사점까지 정말 만족이다. 이래도 좌편향이나 친북 따위의 키워드 밖에 이끌어내지 못하는 저능아들과는 살면서 마주칠 일이 없길 간절하게 빈다. 이제는 더 이상 <용서받지 못한 자>를 돌려볼 필요가 없어졌다. 새로운 사골의 등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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