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촬영 전 인터뷰에서 요즘 젊은이들의 삶과 그들 삶의 미스테리를 다루겠다고 말했다. 유아인, 전종서, 스티븐 연이라는 신선한 조합과 자신만의 색깔로 이 약속을 지키는데는 확실히 성공했다. 해미(전종서)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자 훌쩍 아프리카로 떠난다. 기다리는 종수(유아인)을 위해 '없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위로를 남긴 채. 종수에겐 이것이 퍽 위안이 되었는지, 그녀의 고양이를 돌보며 보름 넘게 해미를 기다린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 옆엔 신경을 긁는 의문의 금수저 벤(스티븐 연)이 있다. 종수의 파주나 해미의 후암동과 달리 벤의 서래마을은 너무 여유있는 동네다. 벤은 종수에게 소중하거나 필요한 것들의 가치를 (본의 아니게) 계속 깎아내리고, 하나씩 빼앗는다. 벤의 집에 초대된 종수가 불편함에 몸서리를 치며 '한국엔 개츠비가 너무 많다.' 라고 말하는데, 감독은 이런 식으로 요즘 젊은이들의 삶을 조명하고 위로하려 든다.


이 정도면 배우들의 연기로 호평받는 썩 괜찮은 대중적인 영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불친절하고 지루하다는 평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차원의 대화를 시도한다. 칸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의 표현대로 <버닝>은 미장센이 그득하며, 관객의 지적능력을 계속 기대한다. 한 명의 예술가로서 감독이 작품에 더 깊은 차원의 질문을 던지는 부분에서 예술성을 확보하는 것 아닌가 싶다. 


다만 아쉬운 점은, 감독의 캐치볼이 지나치게 길어진다는 것이다. 인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옅고 애매한데 끝없는 은유로 관객을 시험하니, 한 두개 놓치기 시작하면 지루할 수 밖에 없다. 나를 위해 '제물'을 바치는 느낌이라 요리가 좋다는 대사나, 누군가의 비극과 경험을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 대조 뒤에도 하루키와 포크너, 68운동이나, 고양이까지, 관객의 배경지식에 대한 요구가 너무 많다. 영화를 되새기며 공부하자면 주제가 많아 좋지만, 영화관 안에서는 몸을 뒤척일 수 밖에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또, 누가 봐도 벤을 의심하게 만들어 놓고 끝에 가서는 시치미떼는 것도 조금 얄밉다.


이런 불친절함에도 불구하고 <버닝>은 분명 쫓아가고 싶고, 알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창동'이라는 수식어를 떼더라도 감독의 편지를 촛불에 비춰가며 하나하나 뜯어보고 싶어진다. 대중성과 예술성이 무엇인지 함부로 논할 수는 없지만, 영화와 예술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단층을 분석해서 접근하는 시야를 열어줬다는 점에서도 좋게 평하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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