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부산에서는 총성 없는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전쟁 직전 총 선거에서의 패배와 거창 양민 학살 등으로 입지가 위태로워진 이승만은 일찌감치 도망쳐 임시수도 부산에서 새 판을 짜고 있었다. 국민은 총선거 결과를 통해 이승만에 대한 염증을 표현했고, 反이승만 계열의 국회의원들은 내각제 개헌을 통해 이승만을 몰아내려 했다. 테러와 공작에도 불구하고 내각제 개헌이 착착 진행되자, 이승만은 최후의 보루로 부산 지방의회 의원 선거를 추진했다.


지방의원 선거의 목적은 국민의 대리인을 세우고 지방자치제도의 초석을 닦는 것이 아니었다. 꼭두각시들을 이용해 내각제 개헌을 저지하고 이승만의 입지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이에 민주주의 수호를 명분으로 참전한 미국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미국은 이승만이 뜻을 굽히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계엄령 선포와 유엔군 과도정부 수립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에 의해 사조직처럼 이용되었던 군대는 대구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계획했다. 군대 내에는 당시 참모총장처럼 군의 정치개입에 완강히 반대한 세력도 있었으나, 일본군 출신으로 가슴 속에 야망을 가지고 있던 세력도 있었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여론에 힘입어, 국회는 내각제 개헌에 박차를 가한다. 1952년 4월부터 7월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을 일컬어 '부산정치파동'이라 한다.


역사가 말해주듯 결국 이승만과 국회의원들의 타협안인 '발췌개헌안'이 통과되고, 직선제가 채택된다. 먼저, 미국은 이승만이 위험한 인물이지만, 한국의 반공 요새화에 그만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에게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보다 공산주의 전파의 저지가 더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또한, 국회의원들이 추진했던 내각제 개헌은 역사적 신념이나 미래지향적 안목이 결여되어 있었고, 단지 정적 이승만을 견제하고 제어하기 위해 진행되었을 뿐이다. 이승만에 대적할만한 인물의 부재로 인한 약한 결속으로 인해 경쟁력이 약했던 국회는 이승만의 집요한 방해와 미국의 외면 앞에 쉽사리 흩어졌다.


부산정치파동은 대한민국 국민이나 민주주의를 생각한 인물, 단체, 국가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공정한 선거와 제도화된 안전 장치 없는 정치 제도가 권력자에게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 보여준 사건이다. 65년이 지난 지금 역시도 시사하는 바가 크며,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가 생각하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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